오늘 우리는 바람직한 투자자·기업 관계 정립을 통해 대한민국 기업거버넌스(corporate governance)를 개선하여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고 초일류 경제로 도약하자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국전쟁 후 잿더미에서 일인당 국민소득 3만불의 경제강국으로의 성장은 한국의 기업인과 노동자들의 영웅적 활약의 결과입니다. 권위주의 경제개발 시기에 국가는 신용배분을 통해 수출산업과 기간산업을 육성하며 기업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기업과 경제의 성장에 따라 자본시장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경제위기를 거치며 국가의 경제계획과 기업지배가 사라진 오늘 대한민국의 장기적 성장을 담보하는 경제의 구조조정과 자본배분의 효율성은 기업거버넌스의 역할로 남았습니다.
한국경제를 견인한 기업과 기업인들이 오늘날 수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황제경영, 사익편취, 불법승계 의혹으로 시달리며, 양극화와 불평등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습니다. 국가경제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어야 할 기업활동이 사회적 정당성과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투명성을 뛰어 넘는 효과적인 기업거버넌스가 어느때보다 중요합니다.
기업거버넌스는 회사의 주요한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규약이며, 회사에 자금을 공급한 사람들, 즉 주주가 그들의 투자에 대한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기제입니다. 구체적으로 기업경영을 위한 내부통제 및 절차에 대한 시스템과, 경영진, 이사회, 지배주주, 일반주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권리, 역할, 책임의 정의를 포괄합니다. 또한 이해관계자들간 이해상충의 최소화를 위한 견제, 균형 및 인센티브 체계로, 회사의 일부주주가 다른주주들의 현금흐름 및 자산을 편취하는 행위를 방지하고, 기업의 장기적 지속성을 보장하는 구조입니다. 현재 한국기업의 정당성 위기는 기업거버넌스의 위기이며, 이는 대한민국에서 기업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인 주주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위기입니다.
대한민국 기업의 주주는 누구입니까? 피터 드러커는 1976년 저작 <The Unseen Revolution. How Pension Fund Socialism Came to America>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자본가라면 미국의 진정한 오너는 미국의 노동자, 즉 국민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19년 우리나라 기업의 실질적 오너는 대한민국 국민, 즉 2230만 국민연금 가입자, 578만 퇴직연금 가입자, 110만 공무원연금 가입자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국민 노후자금 격인 국민연금은 가입자 소득의 9%를 매월 원천징수해 조성한 약 700조원중 120조원을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으며, 올해만 10조원을 순매수해 증권시장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납세자들의 노후자금 상당부분이 공개된 기업에 투자되었음에도 주주 일반의 권리가 법과 제도의 결함으로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현실때문에 기업거버넌스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고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기업은 소수지분을 가진 지배주주가 계열사를 통해 우호지분을 확보한 후 기업전체를 지배하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기업거버넌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상장사의 일반 주주와 기관투자가들은 합병, 분할, 자진상장폐지, 지주회사 전환 등의 굵직한 자본거래와 다양한 특수관계자 거래를 통해 자신들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이익을 소수의 지배주주가 편취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일반 주주들이 다수의 주식을 보유한 비지배주주(majority non-controlling shareholders)로 소수의 주식을 보유한 지배주주(minority controlling shareholders)에 의해 제도적으로 기업거버넌스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왜냐하면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동은 기업 포트폴리오를 쇠퇴산업으로부터 성장산업으로 신속히 재배분하는 과감한 기업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요구하는 반면, 소수 지배주주 중심의 기업거버넌스는 기업의 장기적 성장보다는 기업지배권 강화에 우선한 결정으로 혁신과 성장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2019년 10월말 한국거래소의 시가총액은 약 1600조로 전세계 69개 시장 중 15위에 그쳤습니다. 2017년말 13위, 2018년말 14위에서 또 하락한 순위입니다. 한국기업의 시가총액은 기업의 순자산보다 작습니다. 주가대순자산비율(Price-to-book ratio, PBR)이 1 이하인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 상태입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은 기업거버넌스 위험입니다. 이는 아시아기업거버넌스협회(ACGA)가 2018년 공표한 자료에서 대한민국의 기업거버넌스 랭킹이 아시아 12개국 중 9위에 불과하며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보다 조금 더 나을 뿐이라는 부끄러운 사실로 입증됩니다 (CG Watch 2018). 지금 글로벌 투자업계에서는 만연한 한국 자본시장의 기업거버넌스 위험을 지적하며 한국을 주요시장에서 주변부시장으로 폄하하는 분위기마저 생기고 있습니다. 한국 증권시장의 버팀목인 국민연금을 생각한다면 기업거버넌스를 개선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우리나라의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장부가 대비 선진국 시장의 평균으로 배가시켜 국민의 노후자금과 투자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책적 과제입니다. 그럼 과연 어떻게 한국의 기업거버넌스를 개선시킬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시작된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는 학술적 연구결과, 효과적으로 기업의 혁신, 생산성, 및 주가수익율에 기여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 높은 내부지분율과 각종 경영권 방어수단 및 장외공개매수와 위임장대결의 어려움으로 현재로서는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기업에 대한 민사적 소송의 경우에도 상법, 자본시장법, 공정거래법, 거래소규정의 제도적 미비를 차치하고서라도 증거개시절차의 미비로 효과적인 주주 구제책이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수의 지배주주가 다수의 비지배주주를 기업거버넌스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각종 법규와 제도적 제약이 있는 현재 상태에서 행동주의와 소송중심의 대결적 양상은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와 사회적 갈등을 부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투자자와 기업의 상생을 통한 글로벌 관점의 기업거버넌스 관행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확산시키는 방법으로, 자본시장에서의 기업의 투명성, ESG (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환경, 사회, 지배구조) 성과 개선 및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동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기업거버넌스 및 자본시장 이해관계자 단체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명확히 구별됩니다.
첫째, 우리는 자율적으로 결성된 민간기구입니다. 정부 혹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구의 우산 아래 있는 관변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 및 금융정책 당국과 긴밀히 소통하고 대안을 제시하겠지만, 자본시장 참여자, 독립적 학자와 전문가 그리고 기업거버넌스 개선에 열정을 갖는 기업가들이 모여 투자자와 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기업거버넌스의 모범을 독자적으로 개척해 갈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한국 자본시장 최초의 책임 있는 투자자 중심 포럼이 되고자 합니다. 기업, 경영진, 회계법인, 금융기업의 이익 단체는 많습니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핵심인 일반 투자자와 국민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일부 소액주주협회 이외에는 전무합니다. 우리는 개인, 기관, 연기금 투자자, 사모펀드, 신기사, 창투사,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금융기관들을 중심으로, 독립성을 견지한 법, 경제, 경영학자와 전문성을 겸비한 변호사, 회계사, 금융전문가들이 참여하며, 기업거버넌스 개선을 통해 기업가치를 향상시키고 글로벌 자본시장에 접근하려는 기업을 포함해 투자자의 관점에서 기업거버넌스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합니다.
셋째, 우리는 주주의 권리 및 이익보장에 앞장서는 동시에 공공선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투자자와 기업이 적대적 관계가 아닌 한배를 탄 동반자로 최선의 기업거버넌스 관행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기업의 ESG 성과 개선 및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주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하되, 주가와 배당이라는 전통적, 기계적 지표에만 집착하는 편협한 주주관점을 극복해 주주의 장기적 후생을 극대화 하겠습니다.
넷째, 우리는 극단적 주주행동주의와 연금사회주의를 우려하는 시장참여자들을 잘 이해하고 한국의 실정에 맞는 정책 중심의 제도개선을 추구함에 있어 정치적 중립성을 엄정하게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연구, 교육, 참여 활동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주요활동계획 (1) 연구: 우리는 현재 일반주주의 권리행사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 제도적 요인에 대한 연구활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상법, 자본시장법, 거래소규정, 지주회사법 등에 산재한 제도적 갈등요인을 전문가 집단과 연구하고 정책당국자와 실효성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또한 스튜어드십코드, 책임투자, 공적연기금 운용정책의 발전 방향과 정책 효과를 연구하고 이 결과를 국내외적으로 학술 교류하고자 합니다.
주요활동계획 (2) 교육: 우리는 투자자, 사외이사, 감사위원들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 사업을 전개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광범위한 일반시민에게 기업이 공공선 추구를 위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하며 기업거버넌스 개선이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도약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공익 활동(outreach programme)도 전개할 예정입니다.
주요활동계획 (3) 참여: 우리는 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시민단체의 구습에서 진일보하여 우리나라의 모범적 기업거버넌스 관행을 발굴하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업거버넌스와 관련된 주요한 분쟁과 법원의 다툼에서 객관적인 전문가 증언과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 발견된 기업거버넌스 제도개선사항을 행정부 및 입법부에 적극적으로 정책 건의하여 제도화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직화된 발언권이 없었던 일반 투자자와 국민을 대신해 자본시장에서 투자자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업거버넌스 개선이 한국경제가 다음 단계로 질적 도약을 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임을 깊이 인식합니다. 우리는 투자자와 기업의 대결적, 소모적 논쟁이 아닌 정책 중심, 제도 중심의 연구와 논의를 통해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통해 사회의 공공선을 달성하고 국민과 투자자의 후생을 극대화 시키도록 논의를 주도하고 변화를 추동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의 엄중함을 깊이 이해하고 성실한 태도로 꾸준하게 대한민국의 기업거버넌스 논의를 주도하는 장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12월 12일 발기인들을 대표하여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초대 회장 류영재